Wisdom

우울감과 깨달음

나도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었다. 십수년 전,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이 가장 잘 풀리던 시기였다. 인정받고 있었고, 커리어는 탄탄대로였으며, 가정도 화목했다. 그런데 왜 살아야 하나?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나?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업무 스트레스? 있었다. 하지만 누가 준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에게 준 것이었다. 불행한 환경? 전혀 아니었다. 그냥 우울했다. 팔자술 역학적으로야 설명이 가능하겠지. 혹은 의학적으로도,,, 세로토닌이 어쩌고, 도파민이 저쩌고. 하지만 당사자에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냥 그럴 운이었던 것이다? 그게 위로가 될까?

긍정적으로 살아라, 넌 할 수 있어

“긍정적으로 생각해!” “적극적으로 살아야지!”

이런 말들이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천만에. 오히려 독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우울증에 걸렸겠나. 이런 조언은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뛰어봐!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말. 그럼 대체 누구를 위한 조언인가? 말하는 사람의 자기만족일 뿐이다.

인과응보로 겁주기?

“자살하면 지옥 간다” “업보를 받는다” “다음 생은 더 비참하다”

공포로 사람을 붙잡아둘 수는 있다. 일시적으로는. 하지만 그게 진정한 치유일까? 철저한 마음의 변화를 가져올까?

겁에 질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과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공포는 일시적 족쇄일 뿐, 근본적 해답이 아니다.

모든 것은 공(空)이라는 가르침은?

“모든 것은 환상이야. 실체가 없어. 공이야.”

자살하려고 다리 난간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이 말이 와닿을까? 모든 게 환상이라면 죽는 것도 환상 아닌가? 오히려 더 쉽게 뛰어내릴 수도 있다.

철학적 깨달음이 절박한 순간의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 건 또 다른 망상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그림의 떡을 보여주는 격이다. 수많은 종교, 철학적 믿음들은 현실의 고통앞에서 쉽게 무너지고, 부숴진다.

그래서 “기적”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 “기적”은 변화를 주니까,

그러나 기적이 누구에게나 발생하나?

고통은 사실 정상이다.

여기 불편한 진실이 있다. 삶은 원래 고통스럽다. 아픈 게 정상이고, 힘든 게 정상이다.

어릴때는 대다수는 덜 고통스럽다. 그러나 나이가 먹을수록, 아프고 고통스럽다.

노자는 말했다. “화복은 서로 기댄다(禍福相倚).”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낮이 있으면 밤이 있다. 행복만 있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삶이 아니라 환각이다. 그걸 기대하면, 불행해진다.

붓다도 말했다. “삶은 고(苦)다.” 이건 비관론이 아니다. 현실 인정이다.

감정의 권리

화낼 수도 있다. 고기 먹어도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 고기 먹는다고 지옥 가지 않는다. 슬프면 울 수도 있다.

감정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이 감정을 억누르란 말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충분히 느끼고, 충분히 표현하고, 그리고 흘려보내는 것이다. 단지 성숙한 사람은 어디서 풀어야 할지,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아는 것이지.

누구나 힘들 권리가 있다. 슬플 권리도 있다. 우울할 권리도 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부정하면 더 커진다.

“군자는 감정을 절제한다”는 유교적 가르침이나, “탐진치를 끊으라”는 불교적 가르침이 얼마나 많은 오해를 낳았는가. 감정을 끊는 게 아니라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는 것이다. 억압이 아니라 알아차림이다.” 감정은 절제하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붓다는 극단적 고행을 버렸다. 6년간 극도로 감정과 욕구를 억압했지만, 그것이 깨달음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

실제로 붓다도 울었다. 사리풋타가 입멸했을 때, 아난다가 슬퍼하자 붓다는 “슬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위빠사나 명상에서도 감정을 억누르지 않지, 오히려 “있는 그대로 보라(如實知見)”고 가르친다. 분노가 일어나면 “아, 지금 분노가 일어나는구나”하고 알아차리는 것이지, 분노를 억압하지 않는다.

물극필반의 함정

“물극필반(物極必反)” – 극에 달하면 반대로 돌아온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 함정이 있다. 반(反)이 되기 전에 먼저 부서질 수 있다는 것. 고무줄도 너무 당기면 끊어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극단의 고통이 저절로 행복으로 바뀌기를 기다리는 건 위험한 도박이다. 때로는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

바닥이라고 믿었는데, 더 깊은 바닥이 계속 나오면, 인간은 절망하기 마련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우울증은 감기와 같다. 누구나 걸릴 수 있고, 대부분 회복된다. 특별한 게 아니다. 정상이다. 우울한 감정은 아주 정상적 감정이다.

첫째, 우울한 자신을 인정하라. “나는 지금 우울하구나.” 이게 시작이다.

둘째, 도움을 청하라.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마라. 쪽팔린 것이 아니다. 약한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강하기에 우울하다.

셋째, 작은 것부터 시작하라. 산책 10분, 햇빛 쬐기, 따뜻한 차 한 잔. 거창할 필요 없다.

넷째, 완벽할 필요는 없다. 넘어지면 잠시 누워있어도 된다. 잠시 누워서 회복 안되면, 오래 누워있어도 된다.

마지막으로

우울증을 겪고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같은 터널을 지나고 있다. 어떤 이는 입구에, 어떤 이는 중간에, 어떤 이는 출구 근처에 있을 뿐이다.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우울증은 어쩌면 새로운 탄생을 위한 진통일지 모른다. 지금의 고통이 무의미한 게 아니라, 더 깊고 진정한 삶으로 가는 통과의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꼭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다. 그냥 아픈 거다. 그리고 그것도 괜찮다. 아파도 되고, 의미 없어도 되고, 그냥 그래도 된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 하루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울감과 깨달음”에 대한 2개의 생각

  • 꼭 의미를 찾을 필요 없다는 말이
    오늘따라 와닿네요.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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