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선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답은 뻔하다. 선하면 복을 받는다, 인과응보다, 하늘이 본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이유로 선을 행하는 것은 거래에 가깝다. 내가 이만큼 주었으니 저만큼 돌려받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선행에 대한 보상이 없을 수도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보상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명나라 원료범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젊은 시절 어떤 술사에게 운명을 점쳐 받았는데, 관직도 없고 자식도 없으며 쉰셋에 죽는다는 예언이었다. 그는 그 말을 믿었고, 실제로 예언대로 삶이 흘러갔다. 어차피 정해진 운명이라 여기고 아무런 의욕 없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운곡선사라는 도인을 만났고, 그로부터 명유기조 복자기구라는 말을 들었다. 운명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요 복은 스스로 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그날 이후 매일 자신의 행위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선한 일은 더하고 악한 일은 빼며, 십 년간 삼천 가지 선을 행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진사에 급제했고 아들을 얻었으며 일흔을 넘겨 살았다. 그가 남긴 요범사훈은 후대에 전해져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생각한다. 선을 행하니 복을 받았구나. 맞는 말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원료범이 진정으로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관직이나 자식이나 수명이 아니다. 그것들은 부수적인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얻은 것은 자기 자신의 변화다. 운명에 끌려다니던 사람에서 운명을 만들어가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 변화 자체가 성장이고, 그 성장이 삶의 목적이다.
도가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원신이라 부른다. 태어날 때 품고 온 순수한 정신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면서 욕망과 두려움과 계산이 덧씌워지고, 원신은 점점 흐려진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그 흐려진 것을 걷어내고 본래의 맑음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선행이란 바로 그 과정의 일부다. 남을 돕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탁함을 씻어내는 것이다. 보상을 기대하고 하는 선은 또 다른 욕망을 더하는 것이지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는 선은 자신을 맑게 하는 것이다.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이 어린 시절 늪에 빠진 적이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농부가 그를 건져주었고, 처칠의 아버지는 감사의 뜻으로 그 농부의 아들에게 교육을 지원해주었다. 그 아들이 훗날 페니실린을 발명한 알렉산더 플레밍이다. 그리고 수십 년 뒤 처칠이 폐렴에 걸렸을 때 그의 목숨을 구한 것이 바로 페니실린이었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인과의 신비로움이 아니다. 그 농부가 아이를 구할 때 훗날 그 아이가 자기 아들을 교육시켜줄 것이라 기대했겠는가. 처칠의 아버지가 교육비를 지원할 때 언젠가 그 대가로 아들의 목숨을 구할 약이 개발될 것이라 계산했겠는가. 아무도 그런 계산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고, 도울 수 있었기에 도왔을 뿐이다.
선행의 가치는 결과에 있지 않다. 선행을 하는 그 순간, 인간은 자기 안의 어떤 벽을 넘는다. 이기심의 벽, 두려움의 벽, 계산의 벽을 넘어서 타인과 연결된다. 그 연결의 경험이 인간을 성장시킨다. 역경에서 말하는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는 구절도 마찬가지다. 선을 쌓은 집안에 반드시 경사가 넘친다는 뜻인데, 여기서 경사란 단순히 재물이나 명예가 아니다. 선을 행하는 가풍이 대를 이어 전해지면 후손들의 인격이 달라진다. 인격이 달라지면 선택이 달라지고, 선택이 달라지면 운명이 달라진다. 조상이 물려주는 진정한 유산은 재산이 아니라 품성이다.
건녕이라는 지역에 양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증조부와 조부는 나루터에서 배를 저어 사람들을 건네주는 일을 했다. 어느 해 큰비가 내려 강물이 넘쳤고, 물 위로 재물과 익사자들이 떠다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재물을 건지느라 바빴지만 양씨 집안 사람들은 오직 사람만 구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어리석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몇 대가 지난 뒤 양영은 과거에 급제하여 삼공의 지위에 올랐고, 그 조상들도 추증되어 관작을 받았다. 재물을 건진 사람들의 후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먹고 자고 번식하고 죽기 위해서일까. 그렇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인간에게는 성장이라는 과업이 있다.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더 넓은 시야를 갖는 것,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는 것. 그 성장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 선이다. 선을 행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넘어선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좁은 마음이 타인을 향해 열린다. 그 열림 자체가 확장이고 성장이다.
보상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보상이 있더라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선을 행하는 순간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더라도, 그 사람의 내면에서는 무언가가 달라졌다. 그 달라짐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다른 사람이 된다. 원료범이 십 년간 삼천 선을 행한 것은 삼천 번의 복권을 산 것이 아니다. 삼천 번의 성장을 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