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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와 욕망: 도교의 교훈


노자의 도덕경을 처음 접했을 때가 생각난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는 첫 구절에서 한참을 멈췄다. 말로 할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니, 그렇다면 노자는 왜 오천 자나 되는 글을 남겼단 말인가.

그런데 마왕퇴에서 출토된 백서본을 보면 원문은 “도가도야 비항도야(道可道也 非恒道也)”였다. 상(常)이 아니라 항(恒)이다. 한나라 문제 유항의 이름을 피한 피휘 때문에 바뀐 것이다. “영원한 도”라는 뜻이 원래는 더 명확했다. 그리고 순서도 달랐다. 덕경이 앞에, 도경이 뒤에 있었다. 덕도경이 원래 이름이었을 수도 있다.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저 사람이 정직하다고 하자. 그런데 정직하다는 것이 뭔가. 당신이 이해하는 정직과 내가 이해하는 정직 사이에는 편차가 있다.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오차가 생긴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세상은 나뉜다. 김치라고 하면 나박김치, 부추김치, 갓김치, 총각김치, 깍두기, 배추김치가 다 김치다. 그런데 이름을 하나씩 붙여주니까 다른 것이 되었다. 김치인 것은 변함이 없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노자는 주나라 왕실 도서관을 관리하던 사람이었다. 공자가 예(禮)를 물으러 찾아왔다는 기록도 있다. 춘추시대 말, 주나라가 쇠락하자 노자는 청우를 타고 서쪽으로 떠났고, 함곡관을 지키던 윤희가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그렇게 남겨진 것이 오천여 자다. 사마천조차 노자가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노래자일 수도, 태사담일 수도 있다고 했다.

노자가 도라는 개념을 핵심에 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천명(天命)이나 상제(上帝)라는 관념을 대체한 것이다.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하늘의 뜻이 아니라 자연을 최고의 원리로 삼은 것이다.

2장에서 노자는 말한다. 천하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면, 그것이 추한 것이다. 선을 선이라고 알면, 그것이 선하지 않은 것이다. 이상하게 들리는가. 못난 것이 있어야 아름다운 것이 있다. 악이 있어야 선이 있다. 모든 것이 선하다면, 그것이 그냥 정상인 상태이니 선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나눴기에 다르다고 인식하고, 다르다고 인식하기에 판단을 한다. 판단을 하기에 미추(美醜)를 나누고, 미추를 나누기에 호불호가 갈린다.

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형, 고하상경(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있음과 없음은 서로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고, 길고 짧음은 서로 드러내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댄다. 음양을 이해하면 이 내용은 쉽다. 음과 양은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일단 나누면 좋은 것을 추구한다.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고, 어려운 것보다 쉬운 것이 좋고, 짧은 것보다 긴 것이 좋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에서 자랑질을 하고, 수행은 극혐하면서 하늘에서 복이 떨어지길 바란다.

좋은 것을 추구할수록 반대를 증오하게 된다. 가난이 싫어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호하는 것을 추구하고, 구하는 과정이 쉽기를 바란다. 얻지 못하면 고통스럽다. 고통스러우니까 얻은 사람을 욕한다. 끌어내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유가 있기에 무가 있고, 무가 있기에 유가 있다. 얻기만 해서는 안 되고 버리기도 해야 한다. 큰일을 하고 싶으면 작은 일을 먼저 해야 한다. 높이 올라가고 싶으면 우선 내려가 봐야 한다. 바닥을 모르는 사람은 올라가는 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성인은 무위지사(無爲之事)에 거하고, 불언지교(不言之教)를 행한다. 무위를 이해하려면 유위를 생각해보면 된다. 사람은 먹고 살아야 한다. 먹고 사는 것이 어느 정도 해결되면, 삶의 의미를 찾는다. 성공을 향해 도전하고, 돈을 많이 벌어보고, 연애를 많이 해본다. 그것이 유위다. 그런데 유위를 강조할수록 사람들은 허탈해지고,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낀다. 콜라를 마셔도 갈증이 해소가 안 되니 사이다를 마시고, 그래도 안 되니 술을 마신다.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기에 안 보이는 것을 못 본다.

부동산을 잡으면 어떻게 되는가. 부동산 가격이 올라간다. 법인세를 낮추면 어떻게 되는가. 세수가 올라간다. 탈규제가 무위다. 규칙과 규율을 강조할수록, 사람은 명문화된 것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도덕심이 낮아진다. 내가 법을 어겼어? 하는 사회가 된다. 하한점을 만들었기에 사람들은 거기에 표준을 맞춘다. 법이 세세하고 디테일해질수록 구멍이 많아진다. 똑부러진 것이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똑부러질수록 구멍투성이가 된다.

무위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게으름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다 통찰하기에 아무것도 안 해 보이는 것이다. 때로는 내버려 두면 제대로 간다. 도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신을 믿거나 신의 설교를 믿는 게 아니다. 설교는 언어이고, 언어는 결국 판단을 가져온다. 도교는 누굴 믿지도 않는다.

3장에서 노자는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현명한 자를 높이지 않으면 백성이 다투지 않는다. 귀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이 도둑이 되지 않는다. 욕망할 만한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백성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 왜 한정판 신발이 나오면 미친 듯이 사는가. 희소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자리가 오천만 개라면 누가 대통령 하고 싶겠는가. 도둑이 꼭 도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을 의미한다.

SNS가 없다면, 저 사람들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왜 내 삶만 이 모양이지 하는 생각이 잘 안 들 것이다. 보이지 않으면, 모르면, 질투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증오하는 마음이 생기겠는가. 비교하기에, 차이를 나누는 순간, 모든 평안이 사라진다.

그래서 성인의 다스림은 마음을 허하게 하고, 배를 실하게 하고,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한다. 허기심(虛其心)은 분별심과 욕망을 줄이는 것이다. 실기복(實其腹)은 기본적인 것을 채워주는 것이다. 직업 사이의 수입 차가 크지 않은 나라들이 있다. 용접공이든 의사든 변호사든 열심히 하면 비슷하게 번다면, 사람은 자기가 잘하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겠는가. 모두 버는 돈이 비슷하고 귀천이 없다면, 비교를 안 하게 되고, 과한 욕망이 줄어든다.

약기지(弱其志)는 우리가 교육받은 것과 다르다. 의지력이 강하고 뜻이 크고 목표가 높아야 큰 성취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왜 뜻을 약하게 하라고 하는가. 욕망이 팽창할수록 목표만 보이고, 다른 것이 안 보인다. 마음이 가득 찬다. 각종 간교한 생각들이 떠오른다. 바가지가 바다를 담고 싶어 하는 것이 문제다. 그런 욕망은 왜 생기는가. 나를 안 보고 타인만 보기 때문이다. 남이 돈 많이 버는 것을 보고, 나도 벌어야지 하는 것. 그것이 비현실적 욕망이고, 사욕이다. 그래서 복권도 사고 코인도 산다. 연구도 없이, 그냥 남이 버니까, 고수가 좋다니까 산다. 그리고 벼락부자가 되어서 람보르기니 사고 미녀가 넘치는 풀에서 수영할 것을 꿈꾼다.

강기골(强其骨)은 뼈대를 강하게 하는 것이다. 기초이고, 능력이다. 바가지가 바다를 담을 만큼 크면, 그것은 합리적인 행동이다. 내가 실제 가진 것은 강하게 하고, 내가 가진 것 이상의 욕망은 줄여야 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욕망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다윈 진화론에서 약육강식이니 도태니 하는 것은 실제 자연계에서 그렇게 단순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생태학자들이 수십 년간 관찰했더니, 비슷한 종의 새들이 한 나무에 살면서 먹이를 가지고 다투지 않고, 각자 앉아 있는 가지로 나눠서 자기 몫만 먹더라. 번식력이 강한 미생물이 약한 애들을 몰아내고 정복할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일정 규모로 번식하자 번식을 멈추고, 약한 애들도 먹을 수 있는 수준에서 멈추더라. 자연에는 인간 같은 종족이 없다. 화합이 이뤄진다. 과욕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랑하려고 낭비하고, 먹방 찍으려고 과하게 먹는다. 과식해서 소화제 사먹는 동물이 있던가. 재미로 토끼 죽여서 가죽 전시하는 동물이 있던가.

영원히 백성이 무지하고 무욕하게 하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북한 같다. 인터넷이 안 되어서 바깥 세상을 모르니 내가 사는 곳이 지상낙원이라고 믿는 것. 노자가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다. 지식이란 이름, 의지나 뜻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욕망을 줄이라는 것이다. 무위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닌 것처럼, 무지가 무식해지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욕도 욕망을 다 없애라는 것이 아니다. 언어로는 큰 틀만 전달이 가능하다. 디테일과 핵심은 경험과 실천에서 얻어진다.

자연을 역행하지 않으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 어느 정치체계든 국가든 멸망하는 이유는 결국 평형이 깨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망가지는 것도, 실패하는 것도, 평형이 깨졌기 때문이다. 파텍 필립 시계를 샀는데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으면, 처음에는 다들 무식하네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도 내가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 않으면, 나는 그것에 집착을 할까.

2천여 년 전, 왕실 도서관을 지키던 한 사람이 남긴 오천 자. 언어는 죽은 시체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시체를 파먹고 박제하고, 연구하고 기억하고 암기하고, 나는 생명을 알아라고 하는 것. 그러나 처음에 개념을 잡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하되, 그 다음에는 그 언어를 버려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장자가 말했다. “망호물, 망호천, 기명위망기. 망기지인, 시지위입우천(忘乎物 忘乎天 其名爲忘己 忘己之人 是之謂入于天).” 만물을 잊고, 하늘을 잊고, 그것을 일러 나를 잊는다고 한다. 나를 잊은 사람, 이를 일러 하늘에 들어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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