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얻을수 있는 사람
감로는 뿌리 없는 풀을 적시지 않고, 대도는 인연 없는 사람을 건네주지 않는다. 도교에서 전해오는 말이다. 뿌리가 없으면 비가 와도 소용없다. 인연이 없으면 도가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와 인연이 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도교를 가지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어떤 종교든 상관이 없다.

핵심은 청정무위다. 청정경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본래 고요함을 좋아하는데 욕심이 그것을 끌어당긴다고 했다. 여기서 욕심이란 돈이나 명예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 상대가 이해해주길 바라는 기대, 인정받고 싶은 마음, 결과를 통제하려는 집착. 이런 것들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요즘 사람들이 명상 앱을 깔고, 템플스테이를 가고, 휴식을 위해 돈을 쓴다. 그런데 돌아오면 며칠 못 가서 다시 지친다. 고요함을 밖에서 찾기 때문이다. 청정은 환경이 아니라 상태다. 시끄러운 지하철 안에서도 가능하고, 조용한 산속에서도 불가능할 수 있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마음이 저절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신이 저절로 맑아진다고 청정경은 말한다. 순서가 중요하다. 환경을 바꾸는 게 먼저가 아니라 욕심을 내려놓는 게 먼저다.
자비라는 말도 오해가 많다. 도교에서는 만나면 자비라고 인사를 건네는데, 이것이 단순한 측은지심이 아니다. 불쌍하니까 도와준다, 힘드니까 대신해준다, 이런 게 자비가 아니라는 말이다. 진짜 자비는 때로 냉정하다. 아이가 넘어졌을 때 바로 일으켜 세우는 부모가 있고,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지켜보는 부모가 있다. 후자가 더 어렵다. 상대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면서도 개입하지 않는 것, 그게 상대의 성장을 위해 필요하다면 웃으면서 지켜볼 수 있는 것. 이게 도교에서 말하는 자비다. 회사에서 후배가 실수를 반복할 때 매번 수습해주는 선배가 있다. 본인은 착하다고 생각하겠지만, 후배는 절대 성장하지 못한다. 진짜 자비로운 선배는 후배가 스스로 책임지게 내버려둔다. 그게 더 잔인해 보여도.
효도에 대해서도 말해야겠다. 도교에서는 신선의 도를 배우려면 먼저 사람의 도인 효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효가 뭔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용돈 드리고, 명절에 찾아뵙는 것. 그것도 효의 일부이긴 하다. 그러나 도교에서 말하는 효는 차원이 다르다. 부모가 도를 깨닫게 하는 것, 부모를 도에 가깝게 만드는 것이 진짜 효다. 부모님이 탐욕에 빠져 있으면 그것을 일깨워드리는 것, 부모님이 분노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것을 풀어드리는 것, 부모님이 두려움 속에 살고 있으면 그것을 놓게 해드리는 것. 물질적 봉양은 몸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고, 정신적 봉양은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도의 봉양은 부모의 영혼이 맑아지게 하는 것이다. 쉽지 않다. 부모 세대는 자식에게 배우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래서 더 높은 경지의 효라고 하는 것이다.
경외심도 빠뜨릴 수 없다. 공자는 군자에게 세 가지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고, 덕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머리 위 삼 척에 신명이 있다는 말도 있다. 이건 감시당한다는 뜻이 아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혼자 있을 때 어떤 사람인가. 아무도 모를 때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다. 경외심이 있는 사람은 혼자 있을 때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 경외심이 없는 사람은 남들 앞에서만 점잖다.
청정, 자비, 효, 경외. 도교에서 말하는 도와의 인연은 이 네 가지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서로 분리된 게 아니다. 청정해야 진짜 자비가 가능하고, 진짜 자비를 알아야 참된 효가 가능하고, 이 모든 것의 바탕에 경외심이 있다. 결국 하나로 통한다. 도라는 것이 어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