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가치

한국 사회에서 ‘실패’라는 단어는 묘한 무게를 갖는다. 단순히 무언가 잘못됐다는 의미를 넘어, 그 사람의 존재 가치 전체를 규정하는 낙인처럼 작용한다. 한 번 사업에 실패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 되고, 그 꼬리표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신용불량 기록은 금융 시스템에서 지워지더라도, 주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 사람 예전에 망했잖아”라는 한 마디가 새로운 기회의 문을 닫아버린다.
이런 환경에서 합리적인 개인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당연히 안전한 길을 택한다. 2024,2025년 의대 입시 경쟁률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건 우연이 아니다. 전국 수석급 인재들이 의대로 몰리는 현상, 서울대 공대나 이공계 최상위권 학생들까지 반수해서 의대에 가는 현상은 이 사회가 보내는 신호에 대한 정직한 반응이다. 의사라는 직업은 경기를 타지 않고, 사회적 존경을 받으며, 무엇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극히 낮다. 면허를 따면 어떻게든 먹고산다. 이보다 안전한 선택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이런 합리적 선택들이 모이면 집단적으로는 비합리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한 세대의 가장 뛰어난 두뇌들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유지하는 일로 향한다. 창업보다 취업, 도전보다 안정, 새로운 시장 개척보다 기존 자격증 취득. 개인적으로는 현명한 선택이지만, 사회 전체로 보면 혁신의 씨앗이 마르는 과정이다.
젠슨 황이 최근 조 로건 팟캐스트에서 한 말이 흥미롭다. “성공하면 실패를 두려워하게 되어 안전한 길만 가려고 한다. 이렇게 하면 많은 기회를 놓친다.” 엔비디아를 33년간 이끌어온 사람의 고백이다. 그는 “항상 망하기 30일 전”이라는 마음으로 일한다고 했다. 1990년대 NV1 칩이 완전히 실패해서 대량 반품 사태를 겪었을 때, 그 회사는 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실패에서 배운 것들이 결국 오늘날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를 만들어낸 기반이 됐다. 만약 그때 “실패했으니 퇴출”이라는 논리가 적용됐다면, 지금 우리가 쓰는 AI 기술의 상당 부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의 1세대 대기업 창업주들도 비슷했다. 정주영은 조선소 하나 없이 배 주문을 받으러 다녔고, 이병철은 여러 번의 사업 실패를 겪은 후에야 삼성을 키웠다. 그들에게 실패는 끝이 아니라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시스템 안에서 자란 후속 세대에게 실패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됐다. 안전하게 승계받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안전하게 유지하는 것이 미덕이 됐다. 창업주의 무모함은 칭송받지만, 현재 직원의 무모함은 징계 사유이고 해고 사유이다.
인공지능 시대가 이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범용적 지식을 쌓아서 안정적으로 써먹는 일, 즉 ‘공부 잘해서 좋은 직장 가기’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정보 정리, 문서 작성, 기초 분석 같은 일들을 AI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해낸다. 남는 것은 AI가 못하는 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본질적으로 실패를 동반한다. 열 번 시도해서 한 번 성공하면 잘한 거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 이런 종류의 인재가 나오기는 어렵다.
젠슨 황은 “위대한 성과는 캐릭터에서 나온다. 고통과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스탠포드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에게 “충분한 고통을 빌겠다”고 한 축사는 유명하다. 미국적 맥락에서는 영감을 주는 말이지만, 한국적 맥락에서는 좀 다르게 들린다. 한국에서 고통을 겪으면 다시 일어서기가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신용 회복도 어렵고, 평판 회복은 더 어렵고, 무엇보다 스스로 다시 도전할 심리적 여유를 갖기가 어렵다.
이건 단순히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파산법을 바꾸고 재기 지원금을 늘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문제, 타인의 삶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평가, 끊임없이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문화, “쟤는 잘되고 나는 안 되면 어쩌지”라는 불안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구조. 남이 실패하면 은근히 안도하고, 남이 성공하면 은근히 불편한 마음. 이런 심리적 토양 위에서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자라기는 어렵다.
실패를 용인한다는 건 결국 남의 인생에 대한 관심을 끄는 것이다. “쟤가 망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실패한 사람이 조용히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면서, 학연 지연 혈연으로 촘촘히 엮인 사회에서, 남의 일에 관심을 끄기란 쉽지 않다. 관심을 끄는 것 자체가 일종의 사회적 이탈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국이 가진 강점들, 빠른 실행력, 높은 교육열, 치열한 경쟁을 통한 효율성이 AI 시대에는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다. 정해진 답을 빨리 찾는 능력은 AI가 더 잘한다. 남들보다 빨리 달리는 능력은 방향이 맞을 때만 유효하다. 방향 자체를 새로 만들어내는 능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실패를 견디고 배우는 능력이 앞으로의 경쟁력이라면, 현재의 시스템은 정반대로 설계되어 있는 셈이다.
젠슨 황의 말처럼, 실패를 처벌하는 조직은 혁신을 못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 전체가 실패를 처벌하는 하나의 거대한 조직처럼 작동하고 있다면, 그건 어떤 의미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