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선행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부터
사람들은 흔히 “선행에는 선한 보답이, 악행에는 악한 보답이 따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어떤가? 악인이 벌받는 것은 잘 안 보이고, 오히려 착한 사람들이 손해 보는 경우가 더 많다. 선악응보는 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다.
남에게 친절하고, 다투지 않고,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 하층민으로 살아간다. 반면 매일 음모를 꾸미고, 남을 계산하고, 공적인 것을 빼돌려 사익을 채우는 사람들은 좋은집에 좋은차에 돈도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한탄하거나, 아니면 원친채주들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거나, 조상을 탓하거나, 기억도 못하는 전생을 탓한다. 혹은 일부 종교는 모든 불운과 고난을 “업을 짊어지고 있다”고 해석하고, 일부는 원죄를 이야기하고
정말 그럴까?
먼저 선과 악은 인간의 마음이 향하는 바에 따른 것이지, 명확한 경계선이 있는 게 아니다. 선악과 응보라는 개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선악’의 기준이 과연 합리적인지도 의문이고, 설령 합리적이라 해도 “선행을 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기고, 악행을 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단순한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도가에서는 ‘승부(承負)’를 말한다. “앞 사람이 나무를 심으면 뒷사람이 그늘을 즐기고, 앞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면 뒷사람이 재앙을 당한다”는 뜻이다. 승부는 불교의 ‘인과’보다 더 거시적인 개념이다. 인과가 주로 하나의 원인과 하나의 결과를 가리킨다면, 승부는 여러 원인이 하나의 결과를 만들거나, 하나의 원인이 여러 결과를 낳거나, 여러 원인이 여러 결과를 만드는 복잡한 관계를 포함한다.
즉, 하나의 사건은 여러 요인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이며, 그 사건은 또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된다.
“착한 사람은 가난하고 나쁜 사람은 부자다”라는 생각은 사실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다. 한 사람이 가난한지 부유한지는 출신, 성격, 판단력, 선택, 안목, 학식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른바 ‘선함과 악함’은 ‘가난과 부유함’과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가난에는 가난한 이유가 있고, 성격적 약점 및 습관적 약점, 지식의 부족, 행동력 부재, 판단력 부족 등 을 극복해야만 현재의 틀을 깨고 가난에서 부유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기연민과 원망은 가난한 사람들의 치명적 약점이고, 부유한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도교의 “승부”는 단순히 개인의 업을 짊어지는 것과는 다르다. 업장이나 업보는 인도의 인과윤회 체계에서 나온 개념으로, 도교의 “승부” 관념과는 다르다. 불교의 인과는 단선적인 사고방식이라 복잡한 현실을 설명한다면, “나”는 없다면서, 그럼 “인과”를 경험하는 것은 누구냐? 그런 로직 문제에 빠지기 쉽다.
승부 관념은 크게는 조상이 쌓은 덕이 후손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나타난다. 조상이 좋은 것을 남기면 후손이 그 덕을 보지만, 후손이 사치하고 낭비하면 결국 고갈되어 후대에 해를 끼친다. 작게는 개인의 득실로 나타난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그것이 ‘득’이 되고, 이 ‘득’은 나중에 현실적인 이익과 복으로 전환된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는 신분이 태생적으로 정해져 있고 대대로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윤회 이론도 오직 개인에만 초점을 맞춘다. 반면 고대 중국이나 한국은 평민도 공을 세워 귀족이 될 수 있었고, 과거 제도를 통한 신분 상승이 존재했고, 귀족도 법을 어기면 노비가 되었다.
옛사람들은 “새옹지마”라고 했다. 무언가를 잃었다고 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승부”의 오묘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때로는 당장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않고 아껴두면, 그것이 복이 되어 나중에 돌아온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관점을 하나 더하고 싶다.
만약 정말로 선행을 하자마자 즉시 그 복을 받는다면, 아무도 당신에게 선행할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선행하느라 정신없어서 말이다. 길거리에 쓰레기 하나 떨어질 틈도 없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생기기도 전에 수백 명이 달려들 것이다.
진짜 중요한 선행, 선행 중의 선행은 바로 자기 자신을 선하게 대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자신에게 친절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진정으로 남에게 친절할 수 있겠는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위선이거나 자기기만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고, 자신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선행의 출발점이다.
수행의 핵심도 결국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것이다. 내 안의 삼혼칠백을 조화롭게 하고, 오장육부를 건강하게 하며, 정신을 맑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최고의 선행이다.
남을 돕는 것도 좋지만, 먼저 자신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한다. 자신이 무너진 상태에서 남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결국 자신도 남도 다치게 만드는 일이다. 비행기에서도 산소마스크를 쓸 때는 먼저 자기 것을 쓰고 나서 남을 도우라고 하지 않는가.
선악응보를 기다리며 한탄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자기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행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그것이 진정한 수행의 시작이고, 진정한 복의 시작이다.

정말좋은글
카마수트라가 뭐에요?
아 제가 잘못봥서오 죄슝해옹
살 날리면 가만두지 않을고다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