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 안 되는 진짜 이유, 사랑이 아니라 능력이 부족하다
현대의 이혼율 상승과 비혼 확산은 애정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다. 남자는 가족을 부양할 경제적 힘이 부족하고, 여자는 가정을 운영할 실질적 역량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살림을 굴릴 수 없어서 결혼이 성립하지 않는다. 설사 결혼했더라도 결과가 이혼으로 가는 이유가 된다. 이 현상의 뿌리를 따라가면 대가족의 해체와 소자녀 시대가 만들어낸 구조적 변화가 나온다.
먼저 남성 쪽을 보면 숫자가 말해준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가 추적한 자료에 따르면 33세에서 44세 사이 기혼 비율은 1979년 84퍼센트에서 2018년 66퍼센트로 떨어졌다. 상위 소득 가구는 80퍼센트 선을 유지했지만 중간 소득 이하는 절반 가까이 내려갔다. 결혼이 줄어든 곳은 돈이 줄어든 곳과 거의 겹친다. 사회학자 윌리엄 줄리어스 윌슨(William Julius Wilson)이 1987년에 내놓은 결혼적격 남성 가설(Marriageable Men Hypothesis)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이유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남성의 평균 실질 소득은 1930년생 기준 40대에 약 5만 6천 달러였는데, 1980년생 기준으로는 5만 달러로 줄었다. 금액으로는 크지 않아 보이지만 그 사이 집값과 물가가 몇 배 올랐으니 체감은 전혀 다르다. 가족연구소(Institute for Family Studies)의 분석을 보면, 비대졸 남성 고용률이 가장 낮은 지역에서 비대졸 여성의 결혼율은 44.5퍼센트였고, 고용률이 가장 높은 지역에서는 66퍼센트였다. 일자리가 있는 곳에서 결혼이 이뤄진다는 뜻이다.
한국도 같은 그림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4년 혼인 건수는 역대 최저 수준이었고, 남성의 혼인 연령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집을 사기 어려워서, 안정된 직장이 없어서, 아이를 키울 돈이 없어서라는 답변이 비혼 이유의 상위를 채운다. 과거에는 결혼이 번영의 출발점이었다. 없는 살림에서 시작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금은 결혼이 번영의 도착점이 됐다. 미국 헤리티지재단(Heritage Foundation)의 2025년 보고서가 이것을 캡스톤(Capstone) 현상이라고 불렀다. 1970년 기혼 남성의 자가 보유율이 27퍼센트였던 것이 2023년에는 59퍼센트로 올라갔다. 결혼 전에 이미 집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이 생긴 것이다. 결혼은 삶을 함께 짓는 일에서 완성된 삶을 전시하는 일로 바뀌었다.
그런데 경제력만으로는 절반밖에 설명이 안 된다. 돈이 있어도 결혼을 안 하는 사람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절반은 능력의 다른 축에 있다. 가정을 운영하는 실무 능력, 타인과 함께 사는 기술, 자기 자신을 돌보는 기본적인 역량 말이다. 이것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미국세정연구소(American Cleaning Institute)가 2023년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대학생 자녀를 둔 부모의 74퍼센트가 자기 아이가 혼자 청소할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인정했다. 대학생 본인도 72퍼센트가 같은 답을 했다. 세탁기를 돌릴 줄 모르는 대학생, 계란 프라이를 못 하는 성인이 농담이 아니라 통계인 시대다. 미네소타대학교의 종단 연구(Longitudinal Study)에 따르면 성인 초기의 요리 능력이 10년 뒤의 식습관과 건강 상태를 예측하는 유의미한 변수였다. 자기 밥을 못 짓는 사람이 가족의 밥을 지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과거에는 이런 능력이 저절로 길러졌다. 대가족 안에서 형은 동생을 돌보고, 언니는 집안일을 거들고, 삼촌네 아이들과 뒹굴면서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몸으로 익혔다. 가르치지 않아도 배우는 구조였다. 아이가 다섯이면 큰아이는 반쯤 어른이었다. 명절마다 모이는 친척이 스무 명이면 그중 누군가에게 맞지 않는 아이도 끼는 법을 배웠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보다 훨씬 오래 걸리는 공부를 집 안에서 했다. 이 구조가 무너진 것은 핵가족화가 아니라 소자녀화다. 핵가족이어도 아이가 셋이면 그 안에서 작은 사회가 돌아간다. 아이가 하나이거나 둘인데 나이 차가 크면 사실상 외동처럼 자란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가 2018년에 쓴 과보호 세대(The Coddling of the American Mind)와 2024년에 쓴 불안 세대(The Anxious Generation)가 이 구조를 정면으로 다뤘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부모들은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것을 넘어 불편으로부터까지 차단하기 시작했다.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아이는 실패를 견디는 법을 모르고, 갈등을 겪지 못한 아이는 갈등을 풀 줄 모른다.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 따르면 건강한 성장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자율성(Autonomy), 유능감(Competence), 관계성(Relatedness)이다. 헬리콥터 부모, 그러니까 아이 머리 위를 맴돌며 모든 것을 대신 해주는 양육 방식은 이 세 가지를 전부 잘라낸다. 2022년 발표된 38개 연구를 종합한 체계적 문헌고찰(Systematic Review)에서, 과보호 양육과 자녀의 불안 및 우울 증상 사이에 유의미한 관계가 확인됐다. 부모가 대신 싸워주고 대신 정리해주고 대신 전화해주면, 아이는 편하지만 커서 아무것도 혼자 못 한다. 이것을 미국에서는 실패 발사 증후군(Failure to Launch Syndrome)이라 부른다. 성인이 됐는데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 집에 머무는 현상이다.
여기서 결혼 문제와 연결된다. 자기 빨래를 못 하는 사람이 배우자의 빨래를 해줄 수 있겠는가. 자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대의 감정을 읽어줄 수 있겠는가. 돈을 벌어본 적 없는 사람이 가계를 계획할 수 있겠는가. 결혼은 두 사람이 각자의 역량을 합쳐 하나의 살림을 굴리는 공동 경영이다. 경영 능력이 없으면 경영이 안 된다. 사랑은 동기이지 역량이 아니다.
과거의 대가족은 이 역량의 부족분을 메우는 완충재였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요리를 가르치고, 시아버지가 사위에게 목공을 알려주고, 형수가 시동생의 아이를 봐주고, 삼촌이 조카의 취직을 도왔다. 한 가정의 부족함을 여러 가정이 분담하는 구조였다. 두 사람이 모자라도 열 사람이 채워주니 가정이 유지됐다. 이혼을 하려 해도 돌아갈 데가 시댁이나 친정밖에 없으니 어지간해서는 깨지지 않았다는 현실론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을 도와줄 사람이 주변에 있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지금은 문제가 생기면 둘이서 풀어야 하고, 풀 능력이 없으면 깨진다.
가족연구소(Institute for Family Studies)에서 기고한 한 칼럼은 이렇게 적었다. 자기 자신을 하루하루 돌볼 줄 모르는 사람은 결혼과 출산이 무섭다고. 이 문장은 경제적 무서움이 아니다. 능력의 무서움이다. 설거지가 밀리고 빨래가 쌓이고 냉장고가 비어가는 일상을 혼자서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거기에 한 사람을 더 끼워 넣고 그 위에 아이까지 올리라고 하면 당연히 무섭다.
도덕경(道德經) 33장에 自勝者強이라는 구절이 있다. 남을 이기는 것은 힘이 있는 것이고, 자기를 이기는 것이 진짜 강한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정신적 수양만을 말하지 않는다. 자기 삶을 스스로 굴릴 수 있는 실질적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밥을 짓고, 돈을 벌고, 감정을 조절하고, 문제를 직면하는 능력. 이것이 없으면 혼자 살기도 힘들고, 함께 살기는 더 힘들다.
그러니 비혼과 이혼의 원인을 사랑의 부재에서 찾는 것은 방향이 틀렸다. 사랑은 넘친다. 연애 앱 시장은 해마다 커지고, 로맨스 콘텐츠는 역대 최고 매출을 찍고 있다. 부족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현실로 만드는 실행력이다. 월세를 계산하고, 식단을 짜고, 아이가 열이 나면 병원을 찾아가는 그런 종류의 능력. 화려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지만 가정이라는 구조물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다.
아이를 적게 낳았기 때문에 더 잘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대가 있었다.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는 구호가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울렸다. 그 결과 아이는 잘 먹었고 잘 입었고 좋은 학교에 갔다. 대신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고, 아무 갈등도 겪지 않았다. 부모가 모든 것을 해줬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됐을 때, 몸은 어른인데 살림은 못 하는 사람이 된다. 결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고, 이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유지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 능력이 학교에서 가르쳐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과거에는 가정경제, 요리, 바느질 같은 실과 수업이 있었다. 지금은 수학 한 문제를 더 풀고 영어 단어 하나를 더 외우는 쪽으로 시간이 갔다. 시험 점수는 올라갔지만 어른이 되는 속도는 느려졌다. 교육이 인간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점수를 기르는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브루킹스연구소의 보고서 한 줄이 이 상황을 압축한다. 결혼율의 계층 분화가 불평등을 더 심화시킨다고. 돈이 있는 사람끼리 결혼하고, 돈이 없는 사람은 혼자 남고, 혼자 남은 사람의 아이는 대가족의 도움 없이 또 혼자 자라는 순환. 한 세대의 능력 부족이 다음 세대의 능력 부족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이미 작동하고 있다.
결국 결혼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각자의 부족함을 알고, 그 부족함을 채울 의지와 최소한의 기술을 갖춘 상태에서 성립하는 일이다. 사랑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과거 세대는 대가족이라는 안전망 덕분에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안전망이 걷혔을 때, 개인의 맨 실력이 드러난다. 그 실력이 부족한 사람이 많아진 것이 지금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르치는 것일 텐데, 누가 가르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