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tune

솥의 다리가 먼저 부러진다

돈은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 원래 있던 것을 확대할 뿐이다. 돈이 사람을 되치는 일이 생기는 것은 돈의 성질이 사나워서가 아니라, 돈이 불어나는 속도와 사람이 넓어지는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속도차가 벌어진 만큼이 위험 구간이다.

이 구조를 가장 깔끔하게 보여주는 연구가 하나 있다. 2011년 리뷰 오브 이코노믹스 앤드 스태티스틱스에 실린 스콧 행킨스, 마크 훅스트라, 페이지 스키바의 복권 연구다. 이들은 플로리다의 한 복권 게임에서 십 년치 당첨자 3만5천 명의 파산 기록을 추적했다. 소액 당첨자와 중간 규모 당첨자를 비교하는 방식이었다.

결과는 두 겹이었다. 중간 규모로 당첨된 사람들은 당첨 직후 이 년 동안은 소액 당첨자보다 파산이 적었다. 그런데 삼 년에서 오 년 사이 구간에서 역전됐다. 돈이 파산을 막은 것이 아니라 미룬 것이다. 연구진이 덧붙인 관찰이 더 서늘하다. 나중에 파산한 큰 당첨자들의 순자산과 빚 규모는 소액 당첨자와 거의 같았다. 목돈이 통장을 한 번 지나갔는데, 몇 년 뒤 그 자리에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돈이 들어왔다가 나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돈이 들어와 있는 동안 그 사람의 소비 수준과 판단 방식이 그 돈에 맞춰 재조정됐고, 돈이 빠진 뒤에도 재조정된 습관은 남았다는 이야기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잠깐 입었다가 벗었는데, 어깨가 그 옷에 맞춰 벌어진 채로 남은 것이다.

무너지는 순서는 대체로 정해져 있다. 삼십 년 넘게 시장에서 본 것도 예외가 별로 없었다. 먼저 돈이 는다. 그다음 씀씀이가 는다. 씀씀이가 늘면 그 씀씀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수익률이 생긴다. 예전에는 연 십 퍼센트로도 충분했던 사람이, 이제는 삼십 퍼센트가 나와야 생활이 유지되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 삼십 퍼센트는 원래 하던 방식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방식을 바꾼다. 레버리지를 쓰거나, 잘 모르는 영역에 들어가거나, 아는 사람 말을 믿는다. 다리가 부러지는 지점은 언제나 여기다. 돈을 잃어서 무너지는 게 아니라, 늘어난 생활을 유지하려다 판돈의 성격을 바꾸면서 무너진다.

이 과정을 밀어주는 것이 착각이다. 운으로 번 돈을 실력으로 기억하는 착각. 상승장에서 번 돈은 대부분 시장이 준 것이지만, 계좌에 찍힌 숫자에는 그런 표시가 없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맞혔다고 기록한다. 그 기록이 쌓이면 다음 판에서 베팅 크기를 키운다. 실력으로 번 사람과 운으로 번 사람이 갈리는 지점은 첫 번째 성공이 아니라 두 번째 베팅의 크기다.

돈이 늘면 주변도 바뀐다. 이익을 보고 오는 사람들이 붙고, 그 사람들은 대체로 유능해 보인다. 유능해 보이지 않으면 붙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잃는 것은 돈만이 아니다. 판단을 검증해줄 사람이 사라진다. 예전에는 무모한 소리를 하면 말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다들 좋은 생각이라고 말한다. 주변이 전부 동의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내가 옳아진 게 아니라 검증 장치가 꺼진 것이다.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더 조용하다. 돈이 없을 때는 분배할 것이 없어서 드러나지 않던 것들이, 나눌 것이 생기는 순간 전부 올라온다. 형제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오래된 계산서가 그때 청구된다. 이 손실은 회계로 잡히지 않지만 사람을 가장 깊게 흔든다.

그리고 노출이 있다. 돈이 커지면 보는 눈이 늘어난다. 세무, 규제, 계약, 소송. 감당한다는 것은 돈을 굴리는 능력이 아니라 이 시선들을 받아내는 능력이다. 여기 준비가 안 된 사람은 자산이 아니라 절차에 지친다. 반대로 잃을까 두려워 쪼그라드는 경우도 흔하다. 부자가 되면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지키는 자의 불안으로 갈아탄 것뿐이다. 이 불안은 가난할 때의 불안보다 다루기 어렵다. 이유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명리에서는 이것을 재(財)와 신(身)의 관계로 본다. 사주에 재물의 기운이 많다고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재물을 감당하려면 자기 자신을 뜻하는 일간(日干)이 그만큼 튼튼해야 한다. 일간이 약한데 재성만 많은 것을 재다신약(財多身弱)이라 하고, 옛 책에서는 이런 사주를 부옥빈인(富屋貧人)이라 불렀다. 좋은 집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재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재물이 자기보다 커서 눌리는 상태를 가리킨다. 도덕적인 평가가 아니라 하중에 관한 이야기다. 돈은 무게를 갖고 있고, 무게는 받치는 쪽의 강도를 묻는다.

주역에 이 장면이 그대로 들어 있다. 정괘(鼎卦)의 네 번째 효사다. 鼎折足 覆公餗 其形渥 凶. 솥의 다리가 부러져 공에게 올릴 음식을 엎었고, 그 모습이 젖어 흉하다.

정(鼎)은 부엌 냄비가 아니다. 세 발 달린 청동 솥으로, 제사에 쓰는 나라의 그릇이다. 고대에 아홉 개의 정은 왕권 자체를 뜻했고, 정을 옮긴다는 말은 왕조가 바뀐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이 효사는 국가의 가장 격식 있는 자리에서 벌어진 사고를 그린다. 솥이 깨진 것도 아니고, 음식이 상한 것도 아니다. 다리가 부러졌다. 위쪽은 멀쩡한데 아래쪽이 나갔다. 그리고 엎어진 음식은 바닥에 쏟아지는 게 아니라 그것을 들고 있던 사람이 뒤집어쓴다. 其形渥, 그 몸이 젖는다. 자기가 담고 있던 것을 자기가 뒤집어쓰는 그림이다.

공자가 계사전에서 이 효를 풀면서 붙인 문장이 유명하다. 德薄而位尊 知小而謀大 力小而任重 鮮不及矣. 덕이 얇은데 자리가 높고, 아는 것이 적은데 도모하는 것이 크고, 힘이 적은데 짊어진 것이 무거우면, 화가 미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어긋남을 세 가지로 나눈 것이 정교하다. 덕과 자리, 지혜와 계획, 힘과 짐. 세 가지 전부가 같은 형식이다. 받치는 쪽과 얹히는 쪽의 비율 문제다. 솥의 다리가 셋인 것과 공자가 든 어긋남이 셋인 것은 아마 우연이겠지만, 읽는 쪽에서는 쓸 만한 우연이다. 다리 하나만 짧아도 솥은 서지 못한다. 인지는 넉넉한데 심성이 못 따라가는 사람, 심성은 좋은데 판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는 사람, 둘 다 갖췄는데 체력과 시스템이 없어 혼자 다 하려다 주저앉는 사람. 실제로 무너지는 방식은 대체로 이 셋 중 하나다.

주의할 것은 언제 부러지느냐다. 다리는 솥이 비어 있을 때 부러지지 않는다. 가장 가득 찼을 때 부러진다.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인다는 뜻이고, 이것이 이 구조에서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부분이다. 하중이 걸리지 않은 다리는 튼튼한 다리와 구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리 굵게 만들 수 있느냐. 인지는 어느 정도 가능하다. 배우고 겪으면 넓어진다. 시스템도 가능하다. 의지력으로 사람의 본성과 싸우는 대신, 법인과 계좌와 규칙으로 미리 칸을 나눠두는 방식이 있다. 문제는 심성이다. 심성은 대개 한 번 잃어본 다음에 자란다. 그래서 순서가 고약하다. 필요할 때는 없고, 생겼을 때는 이미 값을 치른 뒤다.

이 사실 때문에 옛사람들이 굳이 이런 문장을 남겨둔 것인지도 모른다. 값을 치르기 전에 남의 값을 읽어보라는 뜻으로. 물론 읽는다고 대비가 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다리를 시험해본 적이 없다. 시험은 언제나 솥이 가장 가득 찼을 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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