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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가 그릇을 보여준다 — 귀인 앞에서 말을 참지 못한 서생의 이야기

사람의 그릇은 말에서 드러난다. 정확히는, 참지 못하는 말 한마디에서 드러난다. 재능이 있고, 기회가 왔고, 귀인까지 나타났는데도 끝내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원인은 능력이 아니라 그릇이다.

송나라 때 분양 무덕(汾陽無德)이라는 선사가 있었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수행하던 시절, 어느 날 한 서생이 찾아왔다. 과거에 낙방한 뒤 도성에 남아 글씨와 그림을 팔아 근근이 먹고사는 처지였다. 어제 장사가 영 안 되어 한 푼도 벌지 못했다. 울화가 치밀어 붓을 들고 시 한 수를 쓴 참이었는데, 옆에서 누군가 한마디 했다. 좋은 시다, 이런 인재를 조정이 몰라보다니. 그 사람은 은자 한 덩이를 건네고, 허리에서 옥패를 풀어주며 말했다. 은은 그대에게 주는 것이고, 내일 이 옥패와 글을 가지고 재상 집으로 가라, 알아서 대접받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 갔고, 주변에 호위하는 장정 몇이 눈에 들어왔다. 서생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것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래서 선사를 찾아온 것이다. 내일 재상 집에 가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습니까.

무덕 선사가 말했다. 세 가지만 지키면 된다. 묻지 않는 것은 말하지 말고, 모르는 것은 말하지 말고, 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마라. 삼불설(三不說)이다. 서생은 고맙다 인사하고 떠났다.

며칠 뒤 서생이 다시 왔다.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중이 되겠다고 했다. 선사가 물었다. 삼불설을 못 지켰구나. 서생이 울먹였다. 딱 한마디만 더 한 겁니다. 어떤 한마디냐고 선사가 물었다. 서생이 대답했다. 이 옥패의 주인이 혹시 당금의 관가이십니까. 상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고, 네가 알 일이 아니라며 매를 들어 쫓아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서생의 실패는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담지 못한 것이다. 은자 한 덩이의 행운까지는 감당했지만, 재상의 집에서 열릴 수 있는 앞날까지는 감당하지 못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것이 아니라, 궁금증의 무게가 그릇보다 컸던 것이다. 옛사람들이 器浅易盈이라 했다. 그릇이 얕으면 쉽게 찬다. 쉽게 차면 넘친다. 넘치면 흐른다. 은자 한 덩이로 이미 그릇이 찬 사람에게, 그 이상의 복은 담길 자리가 없었다.

옛날 사람을 쓸 때 가장 먼저 본 것이 심상(心相)이라는 것이었다. 관상이 얼굴의 생김을 보는 것이라면, 심상은 마음의 생김을 본다. 그리고 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함용(涵容), 품어 안을 수 있는 힘이다. 말을 참을 수 있는가. 들은 것을 묻어둘 수 있는가. 알아도 모르는 척할 수 있는가. 이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그릇의 크기다.

도덕경 15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鄰. 조심스럽기가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 같고, 망설이기가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노자가 여기서 묘사하는 것은 옛날의 도를 잘 행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엇이든 조심스러웠고, 쉽게 나서지 않았다. 같은 장에서 敦兮其若朴 曠兮其若谷이라 했다. 두터움이 다듬지 않은 통나무 같고, 넓음이 골짜기 같다. 통나무는 아직 무엇으로도 깎이지 않았기에 가능성이 무한하다. 골짜기는 비어 있기에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 공통점이 있다. 비어 있다는 것이다. 꽉 차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서생의 문제는 이미 차 있었다는 것이다. 은자를 받은 순간 흥분으로 찼고, 옥패를 받은 순간 기대로 찼고, 재상 집에 들어간 순간 호기심으로 찼다. 더 이상 담을 공간이 없었다. 참는다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빈 공간의 문제다. 비어 있는 사람은 참는 것이 아니라, 아직 찰 여유가 있는 것이다. 차 있는 사람은 참으려 해도 넘칠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기회를 잡지 못하는 사람보다, 기회를 잡고도 놓치는 사람이 더 많다. 기회가 안 온 것이 아니라, 온 기회를 담지 못한 것이다. 귀인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귀인 앞에서 자기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드러내는 방식은 대단한 실수가 아니다. 말 한마디다.

직장에서도 똑같다. 상사가 중요한 정보를 슬쩍 흘렸을 때, 그것을 품고 있을 수 있는 사람과 바로 옆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다. 투자에서도 마찬가지다. 좋은 종목을 알게 되었을 때, 조용히 사는 사람과 주변에 떠벌리는 사람이 있다. 떠벌리는 순간, 그 정보의 가치는 반으로 줄고, 본인의 그릇도 반으로 줄어든다. 정보가 새는 것이 아니라, 복이 새는 것이다.

함용이라는 것은 결국 비움의 다른 이름이다. 비워야 담을 수 있고, 담아야 키울 수 있다. 노자가 골짜기를 이상적인 비유로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골짜기는 가장 낮고, 가장 비어 있고, 그래서 모든 물이 모여든다. 서생에게 모자란 것은 재능이 아니었다.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

말이 많은 것은 성격이 아니다. 그릇이 작다는 신호다. 그릇이 큰 사람은 말이 적다. 적은 것이 아니라, 아직 찰 여유가 있어서 굳이 쏟아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서생이 그 한마디를 참았더라면 재상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한마디가 나온 순간, 그릇의 크기가 보였다는 것.

사람은 말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말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한번 드러난 그릇의 크기는, 좀처럼 다시 가려지지 않는다.

한마디가 그릇을 보여준다 — 귀인 앞에서 말을 참지 못한 서생의 이야기” 에 달린 1개 의견

  • 참 좋은글로 시작하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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