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감사는 기의 물리학이다 – 도교와 현대 과학이 만나는 지점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감사도 예절이 아니다. 이 두 가지는 자기 자신의 기(氣)를 다스리는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도덕경(道德經) 제79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和大怨 必有餘怨 安可以爲善. 큰 원한을 풀어도 반드시 남은 원한이 있으니, 어찌 이것을 잘한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노자는 원한을 푸는 것조차 불완전하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원한을 애초에 쌓지 않는 것, 혹은 쌓인 원한을 자기 안에서 녹여내는 것이 더 근본적인 해법이 된다. 동양에서 말하는 용서란 상대의 잘못을 눈감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응결된 탁기(濁氣)를 풀어내는 행위다.

이것은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몸에 영향을 준다. 하버드 대학교 T.H. Chan 공중보건대학원의 타일러 밴더윌(Tyler VanderWeele) 교수가 이끈 2023년 연구에 따르면,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우울과 불안 수준이 낮았고 전반적인 심리적 안녕감이 높았다. 호프 칼리지(Hope College)의 심리학자 샬럿 반오이엔 윗블릿(Charlotte vanOyen Witvliet)의 실험은 더 직접적이다. 피험자들에게 자신을 상처 입힌 사람을 떠올리게 했더니 혈압, 심박수, 안면 근육 긴장도, 발한량이 모두 올라갔다. 원한을 곱씹는 행위 자체가 몸에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반대로, 용서를 떠올렸을 때는 이 수치들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원한은 마음의 문제인 동시에 몸의 문제다.
동양 의학에서는 이것을 기(氣)의 울체(鬱滯)라 부른다. 분노가 지속되면 간기(肝氣)가 막히고, 간기가 막히면 기혈(氣血) 순환이 정체되어 온갖 병의 씨앗이 된다.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도 怒傷肝, 분노는 간을 상한다고 했다. 서양의 실험실에서 측정한 혈압과 심박수의 상승이, 동양에서 수천 년간 말해온 기울(氣鬱)의 현대적 번역인 셈이다. 원한을 품는다는 것은 타인의 잘못을 자기 몸속에 가두어 두는 것과 같다. 뜨겁게 달군 숯을 손에 쥐고 상대에게 던지려는데, 먼저 데는 것은 자기 손바닥이다.
도덕경 제8장은 上善若水라 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않고, 모든 이가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래서 도에 가깝다. 물이 도에 가까운 이유는 걸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웅덩이를 만나면 채우고, 벼랑을 만나면 떨어진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다. 용서란 이 물의 성질과 닮아 있다. 상대의 잘못에 걸려서 멈추지 않는 것, 그 자리에 고여서 썩지 않는 것. 흘러가는 것이 곧 놓아주는 것이다.
한편, 감사라는 것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도덕경 제79장의 뒷부분에서 노자는 天道無親 常與善人이라 했다. 하늘의 도는 사사로이 가까운 이가 없으되, 늘 선한 이와 함께한다. 여기서 선(善)이란 도덕적 착함이 아니다. 도(道)에 부합하는 상태, 기(氣)가 막히지 않고 흐르는 상태를 뜻한다. 감사는 그 흐름을 만드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 중 하나다.
이것도 연구로 확인된 바 있다. 하버드 의대 부속 매사추세츠 종합병원과 UC 데이비스의 공동 연구에서, 매일 감사한 것을 기록한 그룹은 그렇지 않은 그룹에 비해 수면의 질이 향상되고 운동 빈도가 높아졌으며, 신체적 불편 호소가 줄었다. 54개 연구를 종합한 메타 분석에서도 감사 훈련은 우울과 불안을 줄이고 전반적 정신 건강을 개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가 단순한 예의나 습관이 아니라 실제로 몸과 마음의 상태를 바꾸는 것이다.
도교적 맥락에서 보면 감사란 기(氣)의 방향을 바꾸는 행위다. 불만과 원망은 기를 안으로 응축시키고, 감사는 기를 밖으로 확산시킨다.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유명한 우화가 있다.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고 하니 원숭이들이 화를 냈고,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하니 기뻐했다. 총량은 같다. 달라진 것은 받아들이는 마음뿐이다. 장자는 이것을 어리석음의 예로 든 것이 아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마음의 방향에 따라 기의 흐름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감사란 조삼모사(朝三暮四)에서 네 개를 먼저 받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개를 먼저 받든 네 개를 먼저 받든 상관없이 받는 것 자체에 대해 고요해지는 상태에 가깝다.
결국 용서와 감사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용서는 탁한 기를 흘려보내는 것이고, 감사는 맑은 기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하나는 배출이고 하나는 흡수인데, 둘 다 기의 순환을 원활하게 만든다. 명리학(命理學)의 관점에서도 같은 원리가 보인다. 사주(四柱)에서 오행(五行)의 균형과 흐름을 읽을 때, 어떤 오행이 너무 강하면 설기(洩氣)해야 하고, 어떤 오행이 너무 약하면 생조(生助)해야 한다. 용서는 과잉된 화기(火氣)를 설기하는 것이고, 감사는 부족한 수기(水氣)를 보충하는 것과 같다. 대운(大運)이 바뀌어 좋은 흐름이 왔는데도 여전히 삶이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된 원한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운(運)이 아무리 좋아도 기(氣)의 통로가 막혀 있으면 들어올 것이 들어오지 못한다.
도덕경 제22장에서 노자는 曲則全이라 했다. 구부러져야 온전해진다. 용서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구부러지는 것이다. 자존심을 굽히는 것이 아니라, 기(氣)의 흐름에 맞추어 몸을 낮추는 것이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기도 막히지 않는 곳으로 흐른다. 용서와 감사가 복을 부른다는 오래된 말은,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기의 물리학에 더 가까운 것일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생각해볼 것이 있다. 용서가 어려운 이유는 대부분 상대가 사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사가 어려운 이유는 대부분 지금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둘 다 외부 조건에 자기 내면의 기류를 맡기고 있는 셈이다. 노자라면 이렇게 물었을지 모른다. 상대가 사과해야 내 기가 풀리는가, 아니면 내 기를 풀면 상대의 사과가 필요 없어지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