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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극복하는 것인가, 기다리는 것인가 – 송나라 주씨녀 이야기

사람의 골상(骨相)에는 타고난 기운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마의상법(麻衣相法)에서는 얼굴과 뼈에 담긴 기운을 읽어 그 사람의 앞날을 가늠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오래된 상서(相書)가 결국 운명을 확정짓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불여심(相不如心)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골상도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아무리 나쁜 처지도 마음의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결말로 흘러간다는 뜻이 된다.

송나라 때 강소성 사양(射陽) 호수 남쪽 갯벌 지대에 주육(周六)이라는 사내가 살았다. 염성(鹽城) 일대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이라 당시 기술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주육이 할 줄 아는 거라곤 갈대를 베어 돗자리를 엮는 일뿐이었다. 그에게 열일곱여덟 살 된 딸이 있었는데, 바느질도 길쌈도 배울 데가 없어서 아버지를 따라 돗자리만 엮었다. 유오(劉五)라는 어부가 아들 며느리감으로 이 처녀를 데려갔는데, 막상 살림을 시켜보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며느리였다. 옷도 못 깁고 밥도 제대로 못 짓는다며 곧바로 쫓아냈다. 한 번 쫓겨난 여자를 다시 데려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 뒤 부모마저 세상을 떠나자 주씨녀는 동냥질로 겨우 입에 풀칠하게 되었다.

다행히 주종룡(朱從龍)이라는 이가 불쌍히 여겨 그녀를 거둬 땔감을 해오고 물을 길어오는 일을 시켰다. 여자에게 남자의 일을 시킨 셈이다. 주종룡은 이 여인에게 남편감도 구해주려 했는데, 이 소문을 들은 동네 젊은이들이 장난을 꾸몄다. 이웃 회안(淮安)에 오공좌(吳公佐)라는 사내가 있었다. 본래 부잣집 도련님이었으나 어려서부터 빈둥거리며 놀기만 해서 집안에서 생활비를 끊어버린 탓에 절에 얹혀살며 끼니를 때우는 처지였다. 젊은이들은 이 밑바닥까지 떨어진 사내에게 거지 아낙을 떠안기면 분명 치를 떨며 화를 낼 테니, 그 꼴을 구경하자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오공좌는 사실을 알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이미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출신이 무슨 상관이냐며 오히려 주씨녀와 잘 지냈다. 장난이 통하지 않자 젊은이들은 다시 꾀를 냈다. 아버지가 군 장교인 갈(葛)씨 성의 부잣집 아들이 억지로 오공좌를 도박판에 끌어들였다. 오공좌의 호주머니에는 겨우 천 문(文)이 있었다. 하룻밤을 새우고 나니 천 문이 십만 문이 되어 있었다. 갈씨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다음 날 다시 판을 벌였는데, 또 하룻밤이 지나자 십만 문이 백만 문으로 불어났다. 갈씨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더 이상 도박을 걸지 못했다.

백만 전을 손에 쥔 오공좌는 장사를 시작했고, 몇 년 만에 그 지역의 큰 부자가 되었다. 등을 돌렸던 아버지도 아들이 달라진 것을 보고 다시 손을 잡았다. 돈이 생기자 오공좌는 글공부도 다시 시작해서 작은 벼슬자리까지 얻었다. 주씨녀도 살림이 펴지면서 살결이 고와지고 모습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못하던 바느질과 길쌈도 사람을 붙여 배웠고, 어엿한 안주인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주씨녀가 젊어서 구걸하던 시절, 관상에 밝은 엄(嚴) 노인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여인이 지금은 거지꼴이지만 골상이 매우 귀하다고. 실제로 주씨녀의 격국(格局)은 이른바 왕부(旺夫)의 기운을 타고난 것이었다. 자기 스스로는 일어설 힘이 없으나, 누구에게 시집을 가든 그 남편을 일으켜 세우는 기운이 흐르는 명(命)이었다. 처음 그녀를 며느리로 들였다가 쫓아낸 어부의 아들은, 사실 자기에게 찾아온 기회를 제 손으로 걷어찬 셈이 된다.

이 이야기에서 눈여겨볼 것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오공좌라는 사람이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놀기만 하다 절에서 밥을 빌어먹는 신세가 되었으니, 보통 눈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이다. 그런데 이 사내는 남들이 모욕하려고 떠안긴 거지 아낙을 아내로 받아들이고, 천 문짜리 도박판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바닥까지 내려앉은 처지에서도 인연을 귀하게 대한 것이다. 운명학(命理學)에서 말하는 왕부(旺夫)란 결국 여자 혼자서 작동하는 기운이 아니다. 그 기운을 받아들일 그릇이 남자 쪽에 있어야 한다. 오공좌에게는 출신을 따지지 않는 넓은 그릇이 있었고, 그 그릇이 왕부의 기운과 만나 비로소 길이 열렸다.

도덕경(道德經)에 上善若水라는 구절이 있다. 가장 높은 덕은 물과 같다는 말인데, 물은 모든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오공좌가 거지 아낙을 아내로 받아들인 것은, 남들이 깔보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그의 운명을 바꿨다. 반대로 어부의 아들은 바느질 못하는 며느리를 쫓아냈는데, 따져보면 틀린 판단은 아니었을 수 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쓸모만으로 사람의 값어치를 매긴 대가는 평생의 기회를 잃는 것이었다.

운명이라는 것을 놓고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 하나는 정해진 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해진 것을 깨부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세 번째 가능성을 보여준다. 운명은 거기에 있되, 그것이 드러나느냐 마느냐는 만나는 사람, 놓이는 상황,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리는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주씨녀의 골상은 태어날 때부터 귀했지만, 어부의 집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며느리였다. 같은 골상이 오공좌를 만나자 비로소 왕부의 기운으로 피어났다.

교토세라(京セラ)를 창업한 이나모리 가즈오(稲盛和夫)는 자신의 경영철학을 설명하면서 흥미로운 말을 한 적이 있다. 인생의 결과는 사고방식과 열정과 능력의 곱이라고.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고방식이 부정적이면 결과는 마이너스가 된다는 것이다. 이 공식을 주씨녀의 이야기에 대입해보면 재미있는 겹침이 보인다. 어부의 아들은 능력은 있었을지 모르나 사고방식이 눈앞의 실용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오공좌는 능력이 바닥난 상태였으나 사고방식에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가 왕부의 기운을 불러들였다.

인생이 수행이라는 말은 종교인들이 즐겨 쓰는 말이지만, 사실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행이란 결국 자기 그릇을 넓히는 과정이다. 좁은 그릇에는 아무리 좋은 기운이 찾아와도 담을 수가 없다. 주씨녀를 쫓아낸 어부의 아들은 그릇이 좁았고, 절에서 밥을 빌어먹던 오공좌는 가진 것이 없는 대신 그릇이 넓었다.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허(虛)의 경지가 바로 이것이다.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다. 장자(莊子)가 말한 허실생백(虛室生白), 빈 방에 밝은 빛이 깃든다는 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사람 사는 데서 되풀이되는 일이다.

운명을 극복한다는 것은 운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운명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그 흐름 안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주씨녀의 왕부 격국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지만, 그것이 꽃피기까지는 쫓겨나고 부모를 잃고 동냥질하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 동안 주씨녀가 한 것이라곤 살아남은 것뿐이다. 그리고 살아남았기에 오공좌를 만났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수행이었던 셈이다.

관상에 밝았던 엄 노인은 주씨녀의 골상이 귀하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 귀한 골상이 빛을 발하기까지 누구도 그녀를 귀하게 대하지 않았다. 어쩌면 운명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씨앗 속에 이미 나무의 설계도가 들어 있지만, 그 씨앗이 어떤 땅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거목이 될 수도 있고 싹도 틔우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씨앗이 땅속에서 버틴 시간이 없었다면 거목도 없었으리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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