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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불안할 때 – 불안의 근원을 찾는 법

마음이 불안할 때

마음이 불안한 사람은 대체로 미래에 산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걱정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겪는다. 불안의 뿌리는 거의 언제나 불확실성이다. 무엇이 될지 모르는 상황,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국면 앞에서 사람은 흔들린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불확실성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불확실성을 감당할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약할 때 불안은 비로소 고개를 든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를 보면, 한국의 불안장애 환자 수는 2017년 약 65만 명에서 2022년 약 87만 명으로 5년 사이 26% 이상 늘었다. 특히 20대의 증가폭이 두드러져 같은 기간 86.8%나 급증했다. 지난 5년간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진료를 받은 환자가 누적 906만 명에 달한다는 국회 분석도 있었다. 전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꼴이다. 이 수치가 말해주는 것은, 불안이 더 이상 특정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기본 설정값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인의 마음이 이토록 요동치게 된 데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과거에는 정보가 제한적이었다. 신문 한 부, 저녁 뉴스 한 번이면 하루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뉴스와 정보가 쏟아진다. 문제는 그 정보의 성격이다. 2023년 네이처 휴먼 비헤이비어(Nature Human Behaviour)에 실린 대규모 연구에 따르면, 뉴스 헤드라인에 부정적인 단어가 하나 추가될 때마다 클릭률이 평균 2.3%씩 올라간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위협 신호에 더 강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고, 미디어는 그 본능을 정확히 겨냥한다. 부정 편향(Negativity Bias)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17개국 6개 대륙에서 실시된 실험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되었다. 나라와 문화를 불문하고 사람은 나쁜 소식에 더 끌린다.

그러니 매일같이 뉴스를 소비하는 현대인의 마음이 평온하기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다. 둠스크롤링(Doomscrolling)이라는 말이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등장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하버드 헬스 퍼블리싱이 정리한 연구들에 따르면, 이 습관은 불안과 우울 증상, 수면 장애와 직결된다. 본인이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불안이 뉴스를 찾게 하고, 뉴스가 불안을 키우는 악순환이다.

생각이 많아지면 불안은 더 깊어진다. 이것은 단순한 경험담이 아니라 꽤 오래된 통찰이기도 하다. 도덕경(道德經) 16장에서 노자는 致虛極 守靜篤이라 했다. 비움을 극에 이르게 하고, 고요함을 돈독히 지키라는 뜻이다. 마음이 온갖 생각으로 가득 차면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없고, 평정을 잃는다. 노자가 2,500년 전에 짚어낸 것은 지금 심리학이 반추(Rumination)라 부르는 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걱정을 되풀이해서 씹는 행위가 불안과 우울을 악화시킨다는 것은 이미 수많은 임상연구로 확인된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이 있다. 불안한 사람에게 “걱정하지 마라”는 말은 아무 쓸모가 없다. 마치 잠 못 드는 사람에게 “자라”고 하는 것과 같다. 불안을 떨쳐내려면 그 불안의 실체를 들여다봐야 한다. 정확히 무엇이 두려운지를 직면하는 일이다.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이유는, 사람이 스스로 인식하는 두려움과 진짜 두려움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해서 불안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실제 두려움이 경제적 곤란 자체가 아니라, 남들에게 무능하게 보일까 봐 두려운 것일 수 있다. 건강이 걱정된다는 사람의 밑바닥에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것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을 수 있다. 직장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마음 아래에는 자기 존재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이 웅크리고 있을 수 있다. 표면의 걱정을 한 겹, 두 겹 벗겨내야 비로소 진짜 원인이 드러난다.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는 罔兩問景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림자의 그림자인 망량이 그림자에게 묻는다. 아까는 걸었다가 지금은 멈추고, 아까는 앉았다가 지금은 서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줏대가 없느냐고. 그림자가 대답한다. 나에게는 그렇게 되게 하는 무엇이 있고, 그 무엇에게는 또 그렇게 되게 하는 무엇이 있다. 내가 어찌 왜 그런지를 알겠느냐. 표면의 움직임 뒤에는 보이지 않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 뒤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다. 불안도 이와 비슷하다. 눈에 보이는 걱정거리는 그림자일 뿐, 그것을 움직이는 더 깊은 무엇이 있다.

두려움의 근원까지 파고들어 가는 일은 불편하다. 자기 안의 약한 부분과 마주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 지점을 알아야 비로소 구체적인 대응이 가능해진다. 막연한 불안에는 대책을 세울 수 없지만, 자기 존재감에 대한 불안이라면 자기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 행동을 설계할 수 있다. 통제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라면 통제 가능한 영역과 불가능한 영역을 분리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 타인의 시선이 두려운 것이라면 그 시선의 무게가 과연 자기가 부여한 것만큼 실재하는지를 점검할 수 있다.

시장에서 투자를 오래 하다 보면 비슷한 구조를 만나게 된다. 공포에 휩싸여 매도 버튼을 누르는 순간, 정작 본인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손실 자체가 무서운 것인지, 손실을 본 자기가 싫은 것인지, 남들은 벌었는데 자기만 잃었다는 비교가 견딜 수 없는 것인지.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반대로 그 구분을 해낸 사람은 다음번 공포가 몰려와도 자기만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도덕경 33장에 知人者智 自知者明이라는 구절이 있다. 남을 아는 것은 지혜이지만,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이다. 불안의 해법이 바깥에 있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자기 안에 있다. 다만 그것을 꺼내 보는 과정이 편하지 않을 뿐이다.

현대 사회는 그 과정을 더 어렵게 만든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는 생각을 바깥으로 흩뜨리고, 소셜 미디어는 비교의 함정을 일상 속에 심어놓는다. 조용히 자기 안을 들여다볼 시간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불안한 시대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의외로 단순하다. 잠시 멈추고, 지금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이 나왔다고 생각될 때, 한 번 더 물어보는 것이다. 정말 그것이 맞느냐고.

그 질문의 끝에서 만나는 것이 늘 유쾌한 것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안개 속에서 헤매는 것보다는,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아는 편이 다음 발걸음을 내딛기에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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